2021 동리문학상 수상자 박솔뫼 인물론
1.
그날 박솔뫼가 했던 말 중 하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왜냐면 기록해두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정지돈이.
솔뫼씨는 정연아, 내 말 좀 들어봐봐, 라며 말했다.
-제가요, 누워서 생각을 해봤거든요. 나윤이(정연씨 딸)와 저의 공통점을요. 나윤이도 언젠가 그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무슨 생각이요?
-한 달 동안 한 가지 음식만 먹는다면 뭘 먹어야 할까.
-??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왜 안 해요! 솔뫼씨가 말했다, 자기 전에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김밥이겠죠?
우리는 김대중도서관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여름이었고 또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영화에 대해서 책에 대해서 음식에 대해서 옷에 대해서 날씨와 장소와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는 가물가물한데,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상희가 나윤이 비옷을 선물한 건 기억난다. 예쁜 강아지가 그려진 비옷이었다. 그해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고 나윤이는 비옷을 입고 빗속을 강아지처럼 뛰어다니지 않았다. 물론 그건 다른 이야기다. 그러니까 내 말은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거다.
박솔뫼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청소가 하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책장 가득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나니 배가 고팠다. 밥을 먹으니 졸렸고 잠을 잤고 일어나 따뜻한 샤워를 했다. 밝고 어두운 거리를 오래도록 쏘다녔다. 친구들을 생각하며 책을 읽었고 책을 읽으며 친구들을 생각했다. 나윤이와 술래 없는 술래잡기를 하고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큰북 리코더 장난감 기타와 나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요즘엔 늘 그렇다. 직업윤리와 관련된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내게는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야 박솔뫼에 대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평소에 하지 않는 종류의 생각이었다.
2.
박솔뫼가 가끔 나를 정연아, 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내가 기억하는 한 출판계에서 나를 정연아, 라고 부르는 사람은 모두 세 명이다.
1)이광호(문학평론가, 출판사 대표)
2)김민정(시인, 출판사 대표)
3)박솔뫼(소설가)
평론가와 시인과 소설가가 각각 한 명씩이라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르지만 박솔뫼가 소설가를 맡고 있다는 부분은 마음에 든다. 다른 소설가였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는 아니고 뒤에서… 그러고 보면 나는 박솔뫼를 솔뫼야, 하고 부르지 않는데 그건 내가 광호야, 혹은 민정아, 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가. 나는 가끔 박솔뫼가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른 스케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우리는 매일 오후에」나 「사랑하는 개」의 인물들처럼. 그건 사람들 사이의 적정한 거리에 대한 인식이 저마다 제각각인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
혹시 그건 박솔뫼가 소설가이자 출판사 대표가 될 거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그럴 수도 있다. 그때 박솔뫼는 딱 떨어지게도 보이고 여유있게도 보이는 정장을 입고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태도로 이상하고 좋은 책들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때로 아주 이상해서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이미 겪은 과거도 미래처럼 느껴지고 오지 않은 미래도 아주 뻔하고 지루한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채로 존재하는 시간들도 있다. 그걸 나는 박솔뫼-순간이라고 부른다.
이런 거다. 지난 여름 비 오는 동서고가로를 타고 달리며 부산에 살고 있는 내가 있고 지금의 나보다 조금 뚱뚱하거나 조금 마른 그 사람은 그러나 부산 사투리를 쓰지는 않고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부산에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가능세계나 평행세계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게 느껴진다. 내겐 그건 그냥 박솔뫼-순간인 것이다.
3.
-2012년 11월의 나는 『을』을 읽고 다소 혼란에 빠진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 먹고 무작정 영국으로 떠나 맨체스터와 리버풀, 위건과 리즈 등지를 떠돌며 세 편의 소설을 쓴다. 리치 에드워즈의 생일을 기념하며 블랙우드의 막심 시네마Maxime Cinema에서 재상영 중이던 니콜라스 뢰그의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를 본 나는 모든 노트를 태우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어떤 종류의 글도 쓰지 않는다.
-2013년 노동절의 나는 전주 객사길의 한 커피숍에서 여자친구를 기다린다. 『백행을 쓰고 싶다』를 펼쳐 면지에 “금정연 님께 저도 은평구 살았었는데. 은평구 만세! 2013.4.23. 박솔뫼 드림”이라고 적힌 저자 서명을 보다가 문득 여자친구에게 청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거절당한 후에는 전주에 남아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으며 영화제 현장 스탭으로 여러 해를 일한다.
-2014년 가을의 나는 『도시의 시간들』에 들어갈 일종의 해설을 청탁받고 『그럼 무얼 부르지』를 다시 읽지만 정작 해설을 쓰지는 않고 노래만 부른다. 참다 못한 옆집에서 항의를 하고 경찰이 오는 소동이 있었지만 이내 화해한다. 얼마 후 옆집 사람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다가 밴드를 결성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2016년 초여름의 나는 아내의 친구들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다낭에 간다. 다른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칵테일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선베드에 누워 『머리부터 천천히』를 읽는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우연히 베트남 최초로 로베르토 볼라뇨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작가의 인터뷰를 보게 되는데, 작가는 기자를 향해 어린 시절 어머니는 리조트에서 일했다고 어느날 어머니가 관광객이 놓고 간 책을 가져다주었다고 그는 한국어를 알지 못했지만 그것을 보고 또 보았다고 그렇지만 한국어를 읽을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고 지금도 좋아나 맛있어 같은 단어를 겨우 아는 수준이라고 대신 그는 어머니가 가져다 준 책(“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다이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을 거듭 읽으며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래서 작가가 될 수 있었다며 그게 바로 문학의 마법 아닐까요? 라고 말한다.
-2017년 겨울의 나는 『겨울의 눈빛』을 읽는다. 그리고 행방불명된다.
-2018년 5월의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황예인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지금 스피커폰이라며 박솔뫼와 함께 재미공작소에서 『사랑하는 개』 출간 기념 행사를 진행하는 중인데 독자들에게 덕담 한 마디 해달라고 한다. 나는 올해 50억을 버는 게 목표인데 그렇게 되면 여러분 모두에게 1억씩 나누어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 그렇다, 말에는 정말 힘이 있다.
-2018년 12월의 나는 김새벽이 낭독하는 『인터내셔널의 밤』 오디오북을 들으며 며칠 후에 태어날 아가를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든다.
-2020년 4월의 나는 아가에게 『고요함 동물』을 읽어주고, 아가는 무럭무럭 자라서 수의사가 된다. 물론 의미 있고 좋은 직업이지만 행여나 일이 힘들지는 않나 아픈 동물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지는 않나 걱정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2021년 나는 『우리의 사람들』을 읽고 작가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하며 변하지 않는 주제들에 생각한다. 또 나는 『미래산책연습』을 읽으며 내가 아는 미래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향수에 젖는다.
픽션은 단순히 현실을 교란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교란 그 자체이며, 자신이 교란하는 것이라고 여겨질 만한 대상=현실을 사후적으로 생산한다. 그러므로 현실이 픽션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라고 『미래산책연습』 해설에서 강보원은 말한다. 다시 말해, 박솔뫼가 내게 만들어낸 현실들이 있다. 그곳에는 내가 알거나 모르는 박솔뫼들이 있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4.
내가 아는 박솔뫼는 멋있는 옷을 입고 맛있는 가게를 아는 사람이다.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걱정도 많은 사람이다. 일을 강하게 추진하는 사람이라서 『Analrealsim Vol.1』은 그가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형태로는. 또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사람이기도 한데, 딱히 대단한 대가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미스터리다. 안은별과 이상우를 설득해서 함께 「0시 0시+7시」라는 에세이를 연재하기로 하면서 박솔뫼는 뭐라고 말했을까. 우리 서로 폐를 끼치는 사이가 됩시다. 외치세요. 혹은 주저하세요 주저하면서 자신 없이 말하세요. 나는 폐를 끼치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돕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 낮에는 박솔뫼에게 카톡이 왔다. 다른 용건을 이야기하다가 박솔뫼가 갑자기 물었다.
-님 근데 인물론 쓰셨어요?
나는 아직 쓰지 못했다며 ㅠㅠ라고 보냈다. 그러자 박솔뫼가 말했다.
-ㅋㅋㅋ야 열심히 해
나는 으음 앞으로 뭐든 열심히 안 해야지. 아 잠만 열심히 자야지 열심히 안 해 아무것도.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 안 해 절대 안 해, 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약간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아이러니는 옷을 잘 입은 여유로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주제였다. 매일 사람들이 입에 올리지만 치사하고 덜떨어진 기름 향수 분홍색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 아이러니 정말 싫다, 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할게요...
5.
박솔뫼는 언제나 어떤 장소들에 있는데, 가끔은 모든 장소들에 동시에 있는 것 같다. 부산에 있는 박솔뫼 광주에 있는 박솔뫼 대전에 있는 박솔뫼 도쿄에 있는 오키나와에 있는 서울에 있는 박솔뫼 우리의 박솔뫼. 나는 광주에는 지금까지 두 번밖에 가보지 않았고 거의 매년 부산에 가지만 박솔뫼의 부산과는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대전에는 너댓 번쯤 갔는데 가장 최근은 박솔뫼와 함께였다.
박솔뫼와 정지돈과 나는 지난 가을 대전의 독립서점 삼요소에 갔다. 우리는 하루종일 따로 또 같이 강연과 대담 등을 했는데, 마지막 섹션은 독자들과 함께 하는 소설 창작 섹션이었다. 섹션 시작을 앞두고 저녁을 먹으며 어쩌죠, 그러게요 정말 어쩌죠,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박솔뫼는 곤란과 짜증이 옅게 섞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긴장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으레 하는 소리겠거니 괜한 엄살이겠거니 생각했다. 내게 박솔뫼는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사람처럼 각인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함께 행사를 했는데도 그런 인상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러다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야 그의 표정과 자세와 목소리를 통해 아 정말 긴장했구나, 그러고 보면 전에도 그랬던 것 같아 생각하지만 또 그런 긴장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그는 긴장한 상태에서도 조곤조곤 할 말을 다 하는 사람, 조곤조곤 할 말을 다 하다 보면 긴장이 풀리는 타입의 사람이다.
그날 3명의 작가와 9명의 오프라인 참가자 그리고 10명 남짓한 온라인 참가자가 함께 쓴 것은 「대전만세!」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물론 오한기의 『인간만세!』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대전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는 대전관광공사의 의뢰를 받고 대전에 도착한 금정연이 1억원의 원고료가 든 서류가방을 들고 영화를 보러 대전아트시네마에 갔다가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홍콩과 마카오, 런던과 대천 해수욕장을 오가며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였는데, 돌아보면 제법 박솔뫼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내용보다는 누가 무슨 의견을 내건 기각하지 않고 모든 문장을 사용하겠다는 태도가 그랬다. 정작 박솔뫼는 양조위의 정체가 실은 영화평론가 유운성이었다는 누군가의 말에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달라고,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런 박솔뫼의 모습을 보며 박솔뫼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쯤 더 알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6.
한때 나는 박솔뫼를 생각하며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에 등장하는 쿨 에이드 중독자 소년을 떠올리곤 했다. 너무 가난한 나머지 한 봉지에 2쿼트 분량의 주스를 만들게 되어 있는 쿨 에이드 분말을 설탕도 없이 4쿼트 분량으로 만들어 먹는 쿨 에이드 중독자 소년의 이야기를 브라우티건은 이렇게 끝냈다. 그애는 자신만의 쿨 에이드 리얼리티를 만들어 내었으며, 그걸로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았다. 이제는 박솔뫼의 리얼리티가 쿨 에이드 리얼리티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안다. 실은 많이. 가장 큰 차이점은 박솔뫼는 자신이 만들어낸 리얼리티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그저 거기에 있는 것일 뿐이다. 내가 여기에 있고 당신은 거기에 있으며 박솔뫼는 많은 곳에 있는 것처럼.
지난 여름 이후로 나는 박솔뫼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나윤이를 떠올리게 되었다(그렇다, 말에는 정말 힘이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할 거라고 하나도 잊지 않을 거라고 너무 나이가 많지는 않은 어른이 될 거라고 많은 것을 배우고 배를 타고 먼 곳으로 갈 거라고 반복해서 다짐하는 『미래산책연습』의 수미처럼 요즘 나윤이는 많은 것을 다짐한다. 낮에도 놀고 밤에도 놀 거라고. 잠은 자지 않을 거라고. 절대로 멈추지 않고 아주 멀리 갈 거라고. 박솔뫼는 자기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좀처럼 궁금해하지 않는데(단순히 내 감상이 궁금하지 않은 걸 수도 있고), 『고요함 동물』의 권말에 실린 박솔뫼식 동화인 「차미 새미 보미」를 나윤이에 대한 감상은 내게 두 번이나 물었다(두 번 모두 내 대답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 같네요”였다). 그러게, 박솔뫼의 소설에 대한 나윤이의 감상이 나도 궁금하긴 하다.
최근 나는 나윤이와 박솔뫼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했다. TV를 보다가 겨울잠이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된 나윤이는 다소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나는 절대 겨울잠은 안 잘 거야. 동물들은 그래?”
끝으로 인사를 해본다면 안녕 잘 자. 나도 자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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